목포의 역사

지명유래 - 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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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도

멀리서 고하도를 찍은 사진 구름에 가린 태양 밑으로 멀리 고하도가 보인다.

고하도(高下島)는 예전에 보화도(寶化島), 고하도(高霞島) 칼섬 등으로 불리웠다 고하도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하루는 이완용이 고하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하는 말이 강진 군수(郡守)가 자기 생질(甥姪)인가, 자기 친척인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고하도를 이완용으로 하여금 싸게 사주라 하는데 고하도 사람들이 팔라고 하지 않았다. 대대손손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라서 안 판다고 하니까 그 고하도 도민(島民)들을 전부 잡아 놓고 고문과 협박을 해 가지고 결국은 샀는데 삼천오백원에 사 가지고 일본인한테 오천원을 주고 팔았다.

거기다 정종 공장을 만든다고 일본 사람들이 사주라고 해서 호남 지방, 전라 북도 통통 털어 가지고 일본 정종 공장을 만든 것이다. 산 사람은 일본 해군 대장 출신인데 고하도 물이 정종 만들기에 적합한 물 이어서 정종을 만들려고 샀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육지면을 이곳에서 처음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기후 관계, 날씨 관계 등으로 해서 처음으로 시험 재배한 곳이 바로 고하도인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재배했다고 한다.

 

 

달성사

달성사를 찍은 사진. 기와로된 건물과 오른쪽에는 하얀 석탑이 보인다.

죽교동 317번지 에 위치한 달성사는 해남 대흥사의 수말사로 양산 통도사 출신인 노대련선사가 1915년 4월 8일에 세웠다. 달성사는 건물 6동(대웅전,요사체2,칠성각,명부전, 종각) 건평 71평, 대지 126평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에는 신묘한 효과음을 내는 범종이 있는데 1915년 대흥사에서 노대련선사가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범종의 주조년대는 정조 10년(1786년)이며 이종소리가 매우 청아하게 들려서 목포 팔경시중 달사만종이란 시귀에도 나타난다.

 

 

마파지

대성동에서 옛 형무소로 돌아가는 길목을 마파지라 했다. 옛날에 말구루마(수레)가 겨울에 미끄러져서 부서진 일이 있었는데,그때 이일을 계기로 '말 마(馬)'자, '부술 파(破)'자를 써서 그 근방을 마파지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이 근처는 대성동(신창동, 번창동)이 확장되면서 민가가 뛰엄뛰엄 들어서기 시작되었다. 또한, 이곳은 겨울에 서,북풍이 마주치는 곳이기에 목포에서는 추운 곳중에 하나이고 바람이 마주친다는 뜻의 매서운 바람을 맞받아 치는 곳, 맞바람 부는 곳 등의 뜻으로도 마파지라 불렸다 한다.

 

 

목포진

목포진은 목포시 만호동 4통 3반 1-56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는 유적으로 목포영이라고 불리우며 만호(萬戶)가 지휘 통솔했다 하여 만호진, 만호영, 만호청이라고도 불리었다. 만호진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세종 21년(1439년 4월 15일) 의정부가 무안 현의 목포는 왜적침입의 요해처이므로 만호를 파견하고 병선을 주둔토록 건의하여 세종의 재가를 받아 냈다. 이것이 목포만호진의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현재의 목포진 자리에 목포진성(城)이 처음으로 구축된 것은 연산군 8년 어간임이 밝혀지며 당시 중지 건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읍지"에는 성석축의 둘레를 215보, 높이를 7철, 여첩의 둘레를 140보, 높이를 2척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성의 동쪽에 둘레가 35보인 못이 하나 있으며 성문으로는 남문과 서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군사제도의 개편 요구에 따라 목포 개항 2년 전인 1895년(고종 32년)7월 15일 칙령 제 141호로 폐진되었다.현재는 목포만호비와 만호동 일대 일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 등이 만호진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부동명왕상

부동명왕은 대일여래가 모두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오대명왕의 하나이다. 1920년대 말 일인들이 일본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일등바위 아래 암벽에 조각했다. 철퇴를 들고 있는 옆에 '부동명왕'이라 새겨져있으며 현재도 주민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 있다.

 

 

수문통거리

공설시장 앞거리를 말하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바다물을 막는 수문이 있었다. 개항후 이곳을 모두 매립하여 땅이 되었다.

 

 

유선각

유선각의 설경을 찍은 사진. 하얀 눈이 내려서 가지위에 눈꽃이 앉았고 저 멀리 유선각이 보인다.

죽유달산 자락에서 무정 정만조 선생이 유선각 정자에 들러서 시회를 열곤 하였는데, 유배지에서 풀려 나오면서 선비들이 노는 곳이라 해서 유선각이란 이름을 짓게 되었다. 이후부터 鍮達山이 儒達山으로 쓰이게 되었고 이 유선각 현판은 무정 정만조 선생의 제자이며 대통령에 출마했던 신익회선생의 친필이다.

 

 

인어상

옛날부터 사람들이 인어는 몸의 반이 아름다운 여자고, 또 반은 물고기로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한다. 대반동 앞에 있는 인어상은 어떤 예쁜 여자가 빠져 죽어서 됐다는 전설도 있는데 실은 그곳에 애기 바위가 있고 이 동네 애들이 많이 놀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곳에서 놀던 애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인어상이 애기바위 위에 세워진 뒤로는 애들이 죽지도 않고 오히려 죽은 애들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고들 믿고 있다. 이인어상은 80년도에 청년 회의소 전남지구회 회원 대회 행사를 목포에서 주관하게 되었는데, 그 주관 기념 행사로 목포 청년 회의소에서 세웠다고 한다. 이 인어상이 세워진 곳은 우리 목포가 항구 도시인데다가 목포항을 들어오는 관문이 되므로, 드나드는 선박들이 이것을 보고 아름답고 착한 환상적인 마음을 갖도록 해주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째보선창

다순구미 앞쪽에 배를 댈 수 있는 조그마한 만(彎)이 있었는데 이 곳에 부두시설을 하면서 삼면을 막고 한면만 열어놓아서 언챙이 모습을 하였다고 해서 째보선창이라 불리웠다. 현재는 매립되어 없어졌다.

 

 

국도1,2호선도로원표

국도 1호선은 일제하에 1907년부터 시작된 사업으로 목포에서 신의주 압록강교(橋) 까지의 도로를 말하고 2호선은 해남 쪽에서 부산으로 작업을 하였다.1986년 5월 13일 대통령령 제11899호로 국도 제1호선은 목포시에서 평북 신의주시(市)로 되고, 국도 2호선은 목포시에서 부산광역시 중구로 확정되어 시행하고 있다. 특별규정은 없으나 제정할 때 적용되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준은 종선의 도로는 노선번호를 홀수번호로 부여하고 남쪽을 기점으로 북쪽으로하여 서쪽에서 동쪽순으로 하고, 횡선의 도로는 노선번호를 짝수번호로 부여하고 서쪽을 기점 동쪽을 종점으로 하여 남쪽에서 북쪽의 순으로 하였다. 현재의 초석은 유달산우체국 옆에 있는 초석을 말한다.

 

 

뒷개

오늘날 북항이라 불리운 곳이다. 항동쪽이 앞선창(앞개)이라 불리웠고 현재 북항을 뒷개라 불리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리었던 순수 우리말이다.

 

 

만인계터

목포극장에서 만복동고개로 가는 언덕의 오른쪽을 말하는데 개항당시 지금의 복권과 같은 추첨권을 팔아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첨을 하였다 하여 만인계터라 불리었다.

 

 

미륵불

달성사에서 유선각쪽으로 가는 길목, 하늘에 닿을 듯 드높은 절벽 하단에 거대한 미륵불이 있다. 높이 13미터의 이 미륵불은 달성사 주지였던 노대련선사(禪師)가 조성하였다고 구전될 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삼학도 전설의 주인공인 선비가 이곳에서 세 처녀가 타고 있는배를 향해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불종대거리

현재 신안군청이 있는 곳에서 북교동 성당으로 가는 길목에 예전에는 불이 나는 곳을 살피고 종을 치는 철탑이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주변에 장이 섰었다. 이곳 이쌩기장터, 쌍교장터라 불리었다.

 

 

양을산

지금 목포시에 있는 목포대학 뒷편을 보고 비녀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모양이 마치 옛날 여자들이 경대 앞에서 머리를 곱게 빗고 비녀를 꽂아 놓은 형성이라 해서 비녀산이라고도 하다. 또 해발 150미터 높이의 산이다. 앞으로 목포의 이지형으로는 이 산이 목포 시내 한 중앙을 차지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곳에 양을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양을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양을촌이라고 한 것 같다.

 

 

이훈동씨정원

목포시 유달동 4-1번지 유달산 남동쪽 기슭에 이훈동씨집 정원을 말하는데 이 정원은 1930년대에 일본인 우찌다니만빼이가 조성한 정원으로서 면적이 천여평에 이른다. 광복후 해남 출신 국회의원 박기배씨의 소유물이 되었다가 1950년대에 이훈동씨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원은 호남지방에서 제일큰 정원이며 113종(한국야생종 37,일본원산종 39,중국원산종 25,기타 12)의 나무와 순 외래수종 76종, 상록수 69종이며 일본식 석등 춘일형,원주형,직부형, 설견형석등.오중탑, 칠층탑 등 일본식 정원의 표본이기도 한다. 1988년 3월 16일 지방문화재자료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조각공원

시내에서 보이는 유달산 쪽에 1982년 11울 10일에 조성된 조각공원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이루어진 야외 조각 공원으로서 연면적 13,000평의 규모로 당시 불량 주택(초가집)지역으로서 도시 미관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조각공원이 조성되었다. 당시 이 조각공원에는 한국 조각가 연구회(회장 김영중)회원 44명의 작품 104점(청동 52, 대리석23, 합성수지 12, 철 12, 시멘트 2)이 전시되어 목포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었다.

 

 

하당과 당곶

호남 평야를 누비는 영산강 유역에는 청동기시대에 부족사회가 형성되어 살면서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청동기 문화를 창조해 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무안 반도에는 일로 ,청계, 몽탄 등지에 부족 사회를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무안읍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것이 다같이 "당곶진 재읍남육십리 이로방"이라는 것을 보면 현재 목포시 이로동 어딘가가 확실하리라 본다. 그러나 이곳 주위에서 말하기를 하당은 암소 형국이라며 마을 앞에 있는 샘(우물)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긋태' 서쪽을 '서긋태'라 하여 놀이마당에서도 편을 가르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고 바다에 내밀고 있는 육지의 뿌리에는 돌밭 다리가 수로까지 이어져 있어 옛날 이곳에서 어촌이 형성해 있었다. 또한 이곳 주변에서는 땅끝 또는 땅꼬지라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로부터 내려온 구전에 의하면 하당을 창꼬지 또는 창꽃이라 했다 한다. 또한 사람들은 지금도 창꽃, 땅꼬지 혹은 땅끝이라 한다. 그 음이나 뜻으로 보아 당곶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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